Pages

Sunday, September 6, 2020

[홍혜은의 내 인생의 책]①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경향신문

apaterpengaruh.blogspot.com

문학·정치적인 돈타령

[홍혜은의 내 인생의 책]①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여성에게는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구절이 가장 유명한 이 책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곰팡이 핀 대학생임대주택에서 읽었다. 방은 원룸이었고, 옆에는 동생이 자고 있었다. 나는 한구석의 책상에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내내 남자들의 글만을 문학이라고 배워오다가 ‘여성과 문학’이라는 수업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를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원서를 읽는 데 익숙하지 않아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아주 천천히 텍스트를 읽던 그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내 최초의 페미니스트 모멘트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학적이고 정치적인 돈타령”이다. 그때까지 나는 시급을 받아 쓰는 생활을 오래 하며 돈 없이 살 수 없었지만 돈 얘기할 때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지는 삶을 살았다. 돈을 벌러 갔는데 돈 얘기를 꺼내면 돈 주는 사람들이 불쾌한 티를 내고, 돈을 받을 수 없을까 봐 나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는 삶에 익숙해 왔던 것이다.

그런 내게 울프의 글은 정말 짜릿한 감각을 줬다. 울프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주장하며 살기 위해 소위 ‘물적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구구절절 통찰했다. 타인의 통찰이 텍스트로 주어졌다고 해서 바로 삶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지만, 이 글을 부표 삼아 ‘소수자의 개인 되기’를 투쟁적으로 해 나가게 됐다.

내가 이 책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했던지,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많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최저 주거기준 미달의 집에서 방을 같이 쓰며 자라 온 나의 자매는 내 ‘자기만의 방’ 타령을 좀 더 실천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예상 밖의 사건들로 정한 기간보다 이르게 한국으로 끌려와야 했지만, 독일에서 1인분의 삶을 충실히 살다 온 동생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뿐 아니다. 울프는 또한 사람이 잘 먹지 않으면 잘 사랑하고, 생각하고, 잘 자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도 이야기했다. 그간 되도록 잘 먹으려 노력하는 사람으로 살아 왔고, 그 결과 지속 가능한 방식의 채식을 시도하고도 있다.

Let's block ads! (Why?)




September 06, 2020 at 04:39AM
https://ift.tt/3by04RQ

[홍혜은의 내 인생의 책]①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경향신문

https://ift.tt/2YizXIo

No comments:

Post a Comment